죽을 권리 scrap




대법원, '존엄사' 허용 확정 판결



국내 최초로 존엄사 허용 판결이 나왔다고 하여 뉴스가 시끌시끌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안락사를 시행한 병원에 살인방조죄가 적용되었다고 하니
이제부터도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질 것 같긴 하다

안락사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죽을 권리'라는 것에 찬성한다.
살 권리가 있다면 죽을 권리 역시 존중해주어야 맞다고 본다
물론 그게 철없는 궤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많겠지만..

연극 잘자요 엄마 에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살임을 깨닫고 권총자살을 하는 딸 루시가 등장한다
엄마인 델마는 딸에게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열심히 살자고 그녀를 설득하지만
결혼도, 자식의 미래도, 이혼도, 취업도, 어느 하나도 자기 위지대로 결정하지 못한 채
심지어 이혼 이후의 생활마저도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수동적으로 결정되어 살아 온
루시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물론 자살과 존엄사(혹은 안락사)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지만 조금 비약하자면 존엄사가 육체적 질병을 겪는 사람에 대한 죽을 권리의 표현이라면
자살은 정신적 질병을 겪는 사람에 대한 죽을 권리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신적 질병에 의해 주장되는 '죽을 권리'라는 것은
너무 이른 순간에 요구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쉽사리 인정되지 않는다.
정신이나 육체적 붕괴로 인한 죽을 권리의 요구는 그 붕괴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재건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쨌든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살이 아니라 존엄사이니...

우리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고생중이시다
언젠가 밤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고 방 밖으로 나갔는데
할머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프다고 신음하고 계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교하기 좀 우습긴 하지만 나도 발목을 삐었을 때 너무 아프고 서러워서
차라리 발목을 잘라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그 신음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모래주머니처럼, 까끌까끌한 삼베옷처럼 간편하게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그랬겠지만
'아픈 몸'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벗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내 손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동을 할 때마다 이곳 저곳이 아파오지만
내 의지로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첫째로 느끼는 것은 서러움, 둘째로 느끼는 것은 울화, 셋째로 느끼는 것은 체념이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아픈 몸의 감각은 매번 다른 강도로 엄습해 온다.
특히 다리가 아플 경우, 움직여야 하는 매우 사소한 경우들이
(티비 리모콘을 가지러 간다든가 창문을 닫는다든가 문을 연다든가 화장실을 간다든가
물을 마시러 간다든가 하는)
매번 조금씩 조금씩 사소한 스트레스를 유발해서 결국은 머리끝까지 쌓이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자면서 뒤척이다가 다리를 잘못 놓았다든가,
움직이다가 다리를 어딘가에 부딪혔다든가 하는
그런 우연한 순간에 그동안 쌓였던 짜증과 울화가 한달음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신음하시는 것을 듣고도 달려가서 할머니 괜찮으세요? 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괜찮지 않은 게 당연한데 괜찮냐고 여쭈어 봤자 의미가 없고,
괜찮다고 대답해봤자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그건 이미 괜찮아질거에요 토닥토닥 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고통이니)
나도 알고 할머니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년간의 반복적인 일상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이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다시 눈을 감기까지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이
고통으로 시작되어 고통으로 마무리된다면.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활동에 고통이 따르고
고통이라는 1차적 감각 때문에 성취감이라든가 하는
고차원적인 정신적 유희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삶이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야 할까?
그렇게 해서까지 살아야 하는 '삶의 이유'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나는 이미 그것을 느낄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우리 할머니의 경우에는 아이고 죽어야지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면서도 살기 위해 노력하신다.
치료도 열심히 받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승에 남아있고 싶은 어떤 삶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신 거라고 생각하면
새삼 할머니가 대단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투쟁이고, 장애물 달리기의 연속일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 할머니처럼 육체적 고통<<<<<넘사벽<<<<<<인생
이라는, 뭐랄까 희망적인?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경우
죽을 권리가 굳이 필요 없겠지만
나처럼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터다.
물론 그건 아주 극단적인 예시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무책임하거나 나약한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제각각인 것이니 말이다.


아직 구체적인 기준이라든가 용어의 의미적인 부분이라든가 여러 가지 논의점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단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이 나왔다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난 기왕이면 고통 없이 죽고 싶다.
'주홍글씨'의 칠링워스는 '다 젊은 사람이니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지요'라고 하던데
나도 나이를 먹으면 좀 더 다르게 생각하게 되려나. 그럴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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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엄사의 기본철학 &quot;죽음은 삶의 과정&quot; 2009/05/23 00:05 #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존엄사 논쟁은 죽음이냐, 삶이냐의 문제를 넘어서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을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과정, ‘죽어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은 2006년 연세대 간호대학 창립 100주년이자 한국죽음학회 1주년을 기념하여 죽음학자 알폰스 디켄(Alfons Deeken) 교수 초청 강연의 내용이다. 죽음학자 알폰스 디켄 박사의 강연 알폰스 디켄 박사는 죽음학자..... more

덧글

  • 白月淚那 2009/05/22 00:01 # 답글

    으음. 오늘 신문을 봤는데 법원에서 존엄사 인정한 이후로 서울대병원에서인가 존엄사를 결정한 첫 환자가 나왔다고 하는군요.

    저도 죽을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인생은 자신이 사는 것이지 남이 대신 살아주는게 아니잖아요? 자신의 죽을 권리를 법이라는 것에 가로막혀 행사하지 못한다는건 좀 어이없는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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